로맨스를 위한 와인
샤토 라투르∙동 페리뇽 로제
팔메이어 샤르도네
“가을에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한없이 낭만적이 되는 가을날에는 누구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정열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레드 와인이나 황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화이트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레스토랑에는 지금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스테이크 접시에서는 포크가 접시에 부딪혀 나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콸콸콸 와인 따르는 소리, 여기에다 당신이 속삭이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인해 당신의 애인은 지금 사랑에 빠져들어 간다.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면, 샤토 라투르
남성은 마음에 드는 여성을 꼬실 때 전력투구한다. 그녀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도 아까울 게 없다.
발 킬머 주연의 영화 <세인트>에서의 한 장면도 그렇다. 천재 여성 과학자가 풀어낸 저온 핵융합 기술의 공식을 팔아 치우기 위해 발 킬머는 그 여성에게 접근한다.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소믈리에에게 와인을 청한다. 두꺼운 와인 메뉴를 힐끗 보더니 샤토 라투르 1957년산을 주문한다. 주문을 받고 어안이 벙벙한 소믈리에는 다음과 같이 응대한다.
“선생님, 라투르는 사백 파운드가 넘는 고가 와인인데요.” (사실 이런 행동을 보이는 소믈리에는 진정한 소믈리에라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소믈리에는 뛰어난 와인 지식 못지않게 매상을 올려야 유능하다고 인정받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천연덕스럽게 “그렇다면 두 병 주세요”라며 보기 좋게 멘트를 날린다. 어리둥절한 소믈리에는 곧장 사라진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주인공은 끊임없이 여성을 공략한다. 결국 그는 그녀와 친해지는 데 성공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탑(프랑스어로 La Tour)을 라벨에 새긴 라투르(Latour)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와인이다. 보르도 지방 포이약(Pauillac)이 원산지다. 같은 마을에 있는 무통 로쉴드나 라피트 로쉴드보다 강하고 단단한 감촉을 자랑한다.
라투르의 특징은 강한 뒷맛과 풍부한 향이다. 그래서 라푸르를 가장 남성적인 와인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카베르네 소비뇽의 껍질과 씨에서 비롯되는 타닌 성분 때문이다. 한 모금을 입에 물면 입천장 전체가 코팅 처리된다. 침샘을 막아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 난다. 얼얼하게 굳어버린 입안의 느낌 때문에 텁텁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술 같은 느낌도 곧 풀린다. 끊임없이 퍼지는 과일 향의 신선함이 입안 전체로 퍼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균형 잡힌 맛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라투르는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고른 수준의 와인 생산에 성공하고 있다. 경매 시장의 단골 빈티지로는 1961∙1982∙1990∙2000년이 있다. 최근에는 2005년 빈티지의 실적이 탁월하다. 이런 빈티지의 라투르는 어떤 남성들에게는 시음용이라기보다는 관상용 혹은 소장용이다.
2008년 홍콩의 와인 세금이 완전히 면제되었다. 그래서 홍콩에서 와인 경매가 본격화되면서 세계적인 경매 회사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크리스티 와인 경매 회사는 2008년 11월 첫 경매를 실시했다. 경매의 하이라이트 물품으로는 샤토 라투르 셀러에서 직접 보내온 와인들을 대거 선정했다. 샤토 라피트 로쉴드가 메독 최고급 와인이라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대안을 제공한 셈인데 사실 크리스티의 대주주는 샤토 라투르의 주인이기도 하다.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는 마음은 남녀가 다르지 않다. 라투르가 담긴 글라스를 통해 진하고 뜨거운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단번에 마음을 빼앗고자 한다면 우람한 모양의 탑이 그려진 라투르를 기억하자.
로맨스그레이를 위해, 동 페리뇽 로제
연애 시기를 놓친 이를 위해 동 페리뇽 로제를 추천한다. 그들에게 마침내 사랑이 찾아왔을 때 이 샴페인을 들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빛깔을 음미해 보라. 탐스러운 분홍빛 바탕 위에 용솟음치는 거품은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품위 있는 검은 포도 피노 누와와 우아한 청포도 샤르도네를 혼합하여 색을 낸 동 페리뇽처럼 둘이 만나 하나가 된다.
샴페인이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사랑도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다. 하지만 붙잡아야 내 사랑이 된다. 샤메인 지방의 이른 봄에 와인 저장고에서 병이 가끔 깨진 채 발견되었다. 오빌레르 수도원에서 신앙을 연마하던 페리뇽 신부가 발견하기 전에도 병은 수없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페리뇽은 그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이유를 파악하려 했다.
매년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없는 샴페인 지역에서 어쩌다 훌륭한 빈티지를 얻게 되는 해에만 동 페리뇽을 생산한다. 즉 페리뇽은 빈티지 샴페인이다. 여기에 로제란 부제가 더 붙으면 일반 샴페인보다 좀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2008년 봄에 출시된 최근 빈티지 로제는 1998년산이다. 십 년이 지난 다음에 시장에 등장했다. 보통 연도를 표시하는 빈티지 샴페인은 3년 숙성이 최소 조건인데 동 페리뇽 로제는 무려 십 년을 숙성한다. 그러니 출시 직후 맛을 보아도 깊은 맛이 난다. 대부분의 와인들이 몇 년 내로 소비되어 없어지고 말지만 동 페리뇽 로제는 동년의 샴페인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 유유히 등장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의 황혼기에 활력을 얻는 이들을 연상하게 한다.
1963년에 개봉한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로맨스그레이>는 중년의 남성들이 젊은
여성에게 눈을 돌려 벌어지는 소동을 해피엔딩으로 유쾌하게 그린 영화다.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최고의 미각을 발휘하여 샴페인의 참맛과 향을 빚어낸 동 페리뇽. 이 샴페인을 마침내 사랑을 찾아 그 사랑과 함께 달콤한 연애의 세계로 나아가는 로맨스그레이에게 바친다.
잊혀진 사랑을 찾은 여자에게, 팔메이어 샤르도네
와인 한 병으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다. 영화 <폭로>에서 데미 무어는 한때는 애인이었던 부하 직원을 유혹하기 위해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 둘은 나파 밸리로 애정 여행을 떠날 만큼 사랑했던 사이였고, 특히 그 남자는 와인에 심취해 있었기 떄문에 데미 무어는 와인으로 그를 유혹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그에게 팔메이어(Pahlmeyer) 샤르도네 1991년산을 건넨다. 그러자 분위기는 더이상 상사와 부하가 아닌 옛 연인으로 변하면서 영화는 곧장 위기로 치닫는다.
“와! 팔메이어 샤르도네 1991! 어떻게 이걸 구했나?”
남자가 말한다.
옛 애인의 애정 공세에 분위기는 고조되고 옛날을 추억하는 남자는 무기력한 방어력을 드러내 뿐이다. 결국 송사에 이른 사건은 치밀하게 유혹을 준비한 데미 무어의 성희롱 자작극으로 결말이 난다.
팔메이어 양조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 있다. 전직 변호사 출신인 팔메이어는오푸스 원(Opus One) 같은 고급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버트 몬다비가 샤토무통 로쉴드와 합작하여 오푸스 원을 만든 것을 벤치마크했다고 한다. 그는 샤토 린치 바쥬에 합작을 제의헀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아 결국 스스로 고품질 와인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팔메이어는 출시된 후로 <폭로>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 우연히 영화 소품 담당자에 의해 선택된 것이 와인을 명품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팔메이어가 유명하게 된 데는 영화의 공이 크지만 와인 품질도 역시 뛰어나다. 수작업으로 하는 포도 재배와 포도 품질을 최상으로 하기 위한 가지치기, 새 오크 통 사용, 소량 생산 등으로 고품질의 와인 생산에 성공했다. 포도원의 규모가 작아 부티그 와인(boutique wine)에 속하는 와인이다. 영화 속 1991는 이 와인의 데뷰 빈티지(dubut vintage)라 유혹 당하기가 더 쉬웠다. 무언가를 모으고 아끼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물건에 애착을 지닌다. 팔메이어는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와인 속에는 추억과 시간이 녹아 있다. 그 속에는 빈티지를 구성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스며있고, 통과 병을 거쳐 익어가면서 와인들은 여러 빈티지를 겪는다.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 싶을 때 와인만 한 게 없다. 와인은 타임머신이다. 자녀가 태어난 해의 빈티지 와인을 준비해 두었다가 결혼식 피로연에 쓰려는 와인 애호가들은 이미 이러한 매력을 확신하고 있다.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사람, 아낌없이 다 주고픈 연인을 다시 만난다면 아름다웠떤 추억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팔메이어를 준비해보자.
다른 듯 같은 매력
출처: <올 댓 와인. 2(명작의 비밀>, 조정용
저자: 조정용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인 그는, 첫 책 <올 댓 와인?을 통해 와인을 둘러싼 문화와 역사부터 와인을 제대로 고르는 법, 세계를 주름잡는 와인들에 얽힌 이야기, 와인 경매와 와인 투자까지를 속속들이 알려줌으로써 와인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는 용기를,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공감을 불어일으킨 바 있다.
1년의 3할 이상을 세계 와인 명가 탐방에 투자하며 매년 업데이트되는 와인 자료를 모으고 직접 맛을 본 느낌을 담백하게 풀어놓은 <올 댓 와인2>는 명작의 반열에 오른 명품 와인들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비밀을 탐색해가는 과정을 현장감 잇게 들려주어 진정한 와인 맛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책이다.
와인 저널리스트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포도주개론>을 강의하고 있다. 그 외에도 <와인이 요리를 만났을 때>(고저)를 출간했다.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원은 어떤 공간일까? (0) | 2019.07.18 |
---|---|
와인과 건강 | 계절에 어울리는 와인 Ⅳ. 겨울 (0) | 2019.07.08 |
와인과 건강 | 계절에 어울리는 와인 Ⅰ. 봄 (0) | 2019.07.01 |
Colour Agenda (0) | 2019.06.21 |
휴식을 취하라 Take a break (0) | 2019.06.20 |